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테오 리치 (문단 편집) === 중국 선교 === [[파일:90861bd76d9f02d_size91_w750_h420.jpg]] 1577년 [[로마]]에서 출발해 [[인도]]를 거쳐 [[명나라]] [[광둥성]] [[자오칭]](肇慶, 조경)에 들어온 마테오 리치는 6년간 그곳에 머물며 [[중국어]]와 그 지역의 문화, [[유교]] 및 [[불교]]의 경전을 공부했다. 이는 나중에 사대부들과 교류하는데 있어 큰 메리트였는데, 유교 경전에 박식한 외국인은 중국인들이 보기에 호감을 사기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후에 보이는 모습을 보면 알겠지만, 그는 사고가 유연했으며 중국인에게 접근하는 방법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반면 이후 19세기 청나라 말기 중국에 진출한 선교사들은 대부분 유불도를 비롯한 중국의 전통 문화에는 무지한 상태로 중국에 진출한 열강의 빽만 믿고 무차별적인 선교 활동을 벌이면서 중국인들의 반감을 샀고, 이는 이후 의화단 운동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마테오 리치는 북경으로 이동하는 동안 중국의 이곳저곳을 방문하며 중국의 거대함과 부유함을 놀라워 했다(특히 강남지방). 남경에서 불꽃놀이를 구경하곤 곰곰히 계산해보니 일주일동안 남경시민들이 소비한 화약이 자신들이 1년동안 전쟁에 쓰는 화약의 양과 맞먹는다거나 [[대운하]]의 아름다움과 물동량은 [[베네치아]]의 운하와는 도저히 비교가 되지 않았다. 때문에 마테오 리치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등장하는 키타이가 명나라였음을 알게 되었다. 1598년에 [[베이징]]에 들어갔다가 쫓겨났으나 1601년에 [[자금성]]에서 [[만력제]]를 접견하였다. 만력제는 마테오 리치가 헌상한 [[자명종]] 및 다양한 기계에 관심을 보였다. 마테오 리치는 해박한 유교 지식을 바탕으로 사대부들과도 교류하였으며, 이후 중국에 성당을 짓고 선교에 나섰다. 당시 예수회는 황제가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을 가진 중국에서 효과적으로 선교하려면 먼저 황제를 개종시켜야 한다고 판단하고, 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황제에게 접근했다. 만일 황제 및 사대부가 개종한다면 자연히 일반 백성들도 따라서 개종하리라 생각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청나라에 밀려난 영력제의 남명 정권은 실제로 황후와 황태자가 모두 세례를 받았고, 청나라의 공세에 밀리면서 교황청에 “우리를 도와주면 황제인 내가 나서서 중국에 천주교를 퍼뜨리겠다”는 서한까지 보냈지만, 이미 명은 망했고 남명도 언제 망해도 이상할 게 없는 처지였던 데다 당시 교황청에겐 중국에 뭔가를 해주고 말고 할 여력이 없었다.] 따라서 마테오 리치는 황제 및 황제를 보필하는 사대부들을 중심으로 포교 활동을 시작했다. 이는 마테오 리치뿐만 아니라 예수회 자체가 신앙인 엘리트 집단을 만드는 걸 중심으로 포교활동을 한 것도 있는데, 예수회가 포교한 주요 나라마다 예수회가 만든 여러 학교를 창설해서 우수한 학자들을 양성한 것에서도 볼 수 있다. 마침 마테오 리치는 구태소(瞿太素, 1549 ~ 1612)라는 지체 높은 명문가의 자제와 안면을 텄다. 리치는 그에게 수학, 과학과 같은 서양의 기술을 가르쳐주면서 자연스레 교류하였고, 구태소는 마테오 리치의 인품과 학식에 매료되어 다른 사대부들에게도 그를 알렸다. 그렇게 마테오 리치는 예부시랑(차관) 섭향고(葉向高, 1559 ~ 1627)와도 친분을 쌓는 등 사대부들 사이에 모르는 이가 없게 되었다. 사대부 출신 신자로 [[서광계]](徐光啓)와 이지조(李之藻, 1571 ~ 1630)[* 세례명이 레오(Leo)이며 1621년 서광계의 천거로 광록사소경되었다.]가 있는데 이들은 서양의 과학기술서를 번역하고 [[홍포]]와 같은 서양 무기를 들여오기도 하였다. 한편 마테오 리치는 중국인 지인/신자들을 통해 중국에서는 역법이 매우 중요하단 사실을 깨닫고, 예수회 본부에 편지를 보내 천문과 역법 및 계산에 정통한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래서 파견된 이가 [[아담 샬]]이다. 또한 중국에서는 유교의 영향으로 과거에 급제해 관리로써 출세하고 입신양명해 부모와 가문의 이름을 빛내는 것을 삶의 한 가지 지상과제로 여긴다는 것을 알고, 서양에서 사용하던 [[기억술]]인 [[기억의 궁전]]을 기법이라는 책으로 소개하기도 한다. [* 다만 기억술이란 게 당연하게도 머리 나쁜 사람을 머리 좋게 바꿔주는 마법은 아니다보니 중국인들 중에는 마테오 리치가 소개한 기억술이란 것에 큰 기대하고 찾아왔다가 실망한 사람도 좀 있었다고.] 이후 황족인 건안왕(建安王) 주문룡(朱謀壠, 1559 ~ 1620)[* 시호가 혜화(惠和)이다.]과도 교류하면서 중국 선교를 위한 저술활동을 벌여 [[가톨릭]]의 교리를 요약, 정리한 책인 <[[천주실의]](天主實義)>와, 서양 철학자들의 명언 및 사상을 정리한 <교우론(交友論)> 등의 책을 저술했다. 이후 1610년에 베이징에서 58세를 일기로 선종했으며 만력제는 선교사 및 사대부들의 상소를 받아들여 인근에 묘지를 정해 묻어주도록 했다. 서양 학문을 한문으로 능히 번역하고 각종 학문에 능했다는 면에서, 지금같은 세계화가 이뤄지지 않았던 당시로서는 엄청난 능력자임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중국에서는 '이자(利子)'라는 존칭으로 불렸다. 이는 마테오 리치가 한자로는 이마두였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공자]], [[맹자]]처럼 '자(子)' 칭호를 받은 유일한 서양 학자다. 이를 통해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서 어떠한 대접을 받았는지를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중국은 아편전쟁 이후 중국에서 서양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확대로 교세가 쇠퇴해 마테오 리치의 꿈이 실현되지 못했다. 그나마 [[홍콩]]과 [[마카오]]에는 꾸준한 포교 덕분에 신자들이 좀 되는 편이며, 중국 본토에도 지하교회 세력들이 있다고 전해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